양일종원장 칼럼 - <사명과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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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4-11-27 14:35 조회6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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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의학칼럼을 쓰면 주변 지인들에게 보내드립니다. 자랑하기보다는 정리된 정보를 드려서 의학적인 도움이 될 거라는 의미에서입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지 못한 반응이 있습니다. 의학칼럼 내용을 질병에 따른 정보나 실생활에 도움 되는 것을 실어야지 왜 이렇게 울분에 찬 의료 현실 이야기나 비관적인 대한민국 의료 미래를 이야기하느냐? 그러면, 저는 얼마나 대한민국의 의료 현실이 걱정되기에 그러겠냐?
필수 의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필수 의료의 중추가 되는 중견 교수들이 3차 병원을 떠나고 있고, 떠나는 자리에는 새로운 지원자들이 거의 없어서 더 이상 중환자나 미숙아를 돌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대학교수와 일반 병원 봉직의의 급여 차이는 수십 년 전부터 벌어져 있었던 일인데, 최근에 이러한 엑소더스가 발생하게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인지 사회가 관심을 가져줘야 합니다.
그 이유가 힘들고 어려운 것은 차지하고, 다른 의료 분야 즉 성형이나 안과, 피부 계통과 비교하여 필수 의료 분야의 수가가 작은 것도 문제이지만, 그보다는 최근에 발생한 형사적 소추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민사에서 수십억원대 소송에 시달리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의사들의 거취가 결정되게 되었습니다.
의료의 특수성에 따른 올바른 시각으로 봐야 할 문제들이 일반적인 사회 현상의 시각으로 봐서 의료 사고일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든지 또는 결과에 따른 귀납적인 책임 전가를 하는 것은결국 의료의 최일선이자 필수 의료 담당과인 응급의학과나 흉부외과, 일반외과, 소아과 등의 구성원이 점차 줄어들고 지원이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맡겨진 임무를 사명(使命)이라 하고, 책임감과 비슷한 어감으로 어떤 일에 대해 자신이 꼭 해내야 한다는 의식을 사명감이라 합니다. 소명(召命)은 종교적인 색채가 들어간 말로써 사람이 창조주에게서 받은 임무 내지 부르심을 받는 일을 일컫습니다.
사실 박봉이라도 대학에 남아 힘든 과정을 소화하며 중환자를 돌보고, 새로운 논문과 씨름하는 일은 의사로써 해야 할 사명을 뛰어넘은 소명에 가까운 신념으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개인적인 일로 인해 개원을 하거나 중소병원에 봉직하게 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의료 사고에 대한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으로 인해 폭증하는 의료 사고 형사 소추는 실력 있는 중견 의사들을 대학병원에서 떠나게 하고, 신입 수련의의 지원을 막아버리는 현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사법부의 의료에 대한 가혹한 판결과 여러 사건은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 보람과 자부심이 아니라 결과가 나쁘면 육체적인 구속과 더불어 수십억원의 배상과 법적인 책임을 지고 면허 취소를 당하게 된다는 불안과 불신으로 의료계는 멍들어 있습니다. 의료 사고 형사 소송에서 의사가 유죄가 된 건수는 한국이 239건이고 일본은 32건이라는 비교도 그렇고, 한국의 의사 1인당 기소 건수가 일본의 265배, 영국의 895배로 아무리 단순 비교이지만 너무 쉽게 공소할 수 있는 사법 체계도 필수 의료를 무너뜨리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소명으로 무장하더라도 형사 소송에 의해 동료의 신체가 구속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의사들의 정신은 앞으로 나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떨고 있습니다. 중환자를 수술하고 가능성이 떨어지는 환자를 어떻게 용기 내어 돌보겠습니까? 지금까지 잘하던 의료를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필수 의료가 무너져 꼭 필요하지만 약자인 저체중 신생아(미숙아), 중환자, 면역력 저하자, 고령 환자들이 충분한 치료를 받지 못해 생명 연장의 실패로 이어질 때, 그런 내 가족이 피해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을까요? 하루속히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어 논의하고 문제점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복지부 공무원이 수련의들을 만나서 말하길 “의사 증원 문제는 이미 의협과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증원 숫자와 방법은 이미 결정 나 있으니 관여치 말아라.” “의료 소송 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일으킨 의사들이 사과나 하라.” “불가항력적인 의료 사고 해결에 대해서도 의사들끼리 구제책을 만들라.” 이렇게 의료 현장의 어려움에 대해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의료 현실을 외면하는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낙담이 됩니다.
그러나 필자는 포기하지 않고 이러한 칼럼을 통해 목소리를 내는 작은 노력이라도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올바른 의료, 의료 약자가 제대로 혜택받는 대한민국 의료가 바로 서는 날까지 새해에도 계속해 나갈 것을 다짐해봅니다.
양주예쓰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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